ICE CUBE: 박은선, 손은영, 신창용, 장희진, 홍경택
인간의 사고는 녹아야 변화되는 얼음조각과도 같다. Ice Cube는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주관적 관점의 틀, 정형화된 사회적 인식이다. 눈에 직접 보이지 않아 허구 같지만 실재하는 삶의 진실이다. 아이스 큐브는 온도라는 환경에 반응하는 순간 그 모양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관점과 사고에 변화가 오고 삶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이는 곧 세상을 어떻게 인지하는가 이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만든 세상은 우리의 사고의 과정이다. 생각을 바꾸지 않고는 바꿀 수 없다.”라고 말했다. 예술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세상과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표현이다. 인간이 쌓아 온 모든 지혜와 확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이유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 아닐까. 무언가를 또는 누군가를 온전히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예술가는 이미 존재하고 알고 있는 것, 익숙한 대상과 현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해석과 도전을 통해 기존 인식의 정형성, 불통과 단절을 파괴해 나간다. 인식의 프레임은 역설적으로 예술과 삶의 도약과 불가분의 관계로 인간의 인지체계의 범주를 넓히는 전환점이 되어 프레임 밖을 보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작고 부분적인 것인지 우리 앞에 정체불명 미지의 덩어리를 계속해서 던져 놓을 것이다. 나 자신이 적극적으로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나와 세상은 늘 똑같은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이 전시를 통해서 예술가들이 삶 속에서 발견한 프레임을 살펴보고 각자 고유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을 어떤 미적 가치로 구현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다섯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예술적 방향과 비전이 우리의 아이스 큐브를 녹이고 인식의 벽을 넘어, 프레임의 확장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박은선은 검정 라인테이프와 거울, 랜티큘러라는 매체를 통해 원근법의 시점 위에 다른 시점, 다른 공간을 중첩시키는 타블로를 구축한다. 문 아래 문, 벽과 벽, 사람 위에 사람. 나무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며 각각 하늘과 땅에 그 뿌리를 둔다. 땅에 뿌리를, 하늘에 뿌리를 둔 자는 누구인가. 거울에 반사되는 모든 3차원은 평면화되고 관객과 공간은 작품 속 거울 안에서 창문과 문 또는 벽과 나뭇잎이 되어 작품의 유기체로 상호작용한다. 우리는 실재로도 누군가에게 창과 문, 벽이 되며 작은 나뭇잎과 내리는 비 와도 같다. 어쩌면 우리는 의미와 무의미, 허상과 실재의 유기적 관계 그 이중적 경계 위에서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시점에 따른 존재와 공간의 변화를 형상화하여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이 사실인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지 반문한다. 다른 각도로 본다는 것은 나와 세상의 다른 면, 삶의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손은영은 집과 가족에 대한 작가의 성장기 경험이 모티브가 되어 현실 속 불특정 익명의 집들을 통해 인간을 이야기한다. 작가에게 집은 인간의 회귀 본능과 노스탤지어의 근간을 이루는 삶의 뿌리이자 모성이다. 집이라는 형태를 시각적 언어로 의미화하고 주변부를 삶의 중심에 놓는다. 사진 위에 색채를 덧입히고 집의 형태를 왜곡, 변형시키는 디지털 회화 기법을 혼용함으로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상실되어 가는 문화적, 정서적 가치 회복의 중요성을 상기하며 획일적인 현대 주거문화의 기능과 형식을 넘어 집이 욕망과 성공 등 경제적 가치로 치환되어 가는 현실을 경계한다. 시대와 건축 양식의 변화 속에서도 우리는 각자 내 삶이 찾은 의미로 집의 골조와 벽을 세우고 세상의 소음에도 흔들림 없는 구조를 구축, 현재의 시간 속에 내가 머무는 곳의 가치를 정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리라.
신창용은 서로 다른 대중적 캐릭터들을 같은 공간 안에 마주하게 하여 인간의 다양한 속성을 아바타처럼 표현한다. 별이 빛나는 밤, 깊은 숲 속. 낮의 통제를 벗어난 캐릭터들은 각자의 역할을 내려놓고 먹는 행위를 통해 소통하며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한다. 생존과 본능에 순응하는 존재들. 주도권 경쟁도 진영논리에서 오는 긴장과 다툼, 딜레마도 없다. 불가능한 시각적 패러독스의 존립을 위트 있게 구성한다.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푸바오는 먹는 행위, 구르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칭찬받고 사랑받는 존재이다. 반면 인간에게는 많은 조건과 잣대가 주어진다. 편견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존재 그대로의 가치와 존엄을 지키는 자가 히어로가 되는 시대이다. 작가는 이성적 주체를 넘어 인간이 지닌 다양성과 예측불가, 모순된 상황을 통합, 극적인 대비로 연출하며 먹이사슬처럼 얽혀있는 현실 속에서 사회적 코스튬으로 가리어진 인간 본연의 모습과 가치를 환기하고 재해석한다.
장희진은 삶의 상황과 환경은 삶의 패턴뿐만 아니라 예술의 패턴을 발견하고 선택하게 한다. 땅 위에 쌓인 삶의 먼지와 걸음들, 매일매일 쉼 없는 일상의 연속처럼. 캔버스 위 두꺼운 마띠에르의 요철은 켜켜이 쌓인 지층의 단면이나 나이테, 모래사장에 남은 파도의 흔적을 닮았다. 깊이와 높이가 고른 골짜기와 산등선이 요철은 일률적인 곡선의 흐름을 이루고 색의 조합으로 화면에 활력과 리듬을 형성한다. 작가에게 있어 색이란 존재하는 대상의 실재이며 눈으로 보는 세계에 대한 반응이자 감흥이다. 삶의 희로애락이다. 그 대상에 대한 시각적 경험을 모티브로 구조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 안에 색조의 변환을 꾀한다. 삶의 치열함 속에서도 이탈보다는 포용하는 대담함과 집중력으로 몸의 행위 하나하나 그 에너지를 작품 속에 구체화한다. 색 자체의 순수한 조형성과 유희 그 미적 언어로 보이지 않는 우리 내면의 감성을 터치한다.
홍경택 인공적인 사물인 펜과 연필을 통해 인간의 생과 사를 표현한 인공적인 작업. 작가는 자연 위에 인간이 구현한 인공물의 기본 형태를 ‘수평과 수직’으로 해석한다. 방향성이 각각 다른 펜들과 한 방향의 연필 묶음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닮아있다. 때로는 폭발적인 확장성과 역동성으로 때로는 침묵 속에 응집된 빛의 에너지를 그림자의 너울로 드리우며 삶의 궤적을 써 내려가는 내러티브. 익명의 보조자 펜에 색과 캐릭터를 부여하자 펜은 생명을 잇는 호흡을 얻고 주체자로 변신한다. 작품 속 플라스틱 펜들은 더 이상 플라스틱이 아니며 그 펜들을 그린 작품은 더 이상 인공적인 그림이 아니다. 양분화시키는 세상의 아이러니 속에서 그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또는 버린 돌을 주춧돌로 세우는 건축자가 되어 실존적 인간조건의 진면모를 탐색하고 새로운 미적 원리에 대한 개념을 공고히 다지며 다음 스텝을 이어간다.
박은선 작가, 전시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