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 Layers & Layers
허정의 작업에서 기저를 이루는 건 음과 양이다. 음과 양은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고정된 모습이 아니다. 하나의 양상이 상관적 대대법의 차이에 의해 음양으로 나누어지기도 하고 그 음양 또한 역전이 되기도 한다. 이 차이와 역전이 사건성을 불러 일으킨다. 복제, 분열, 증식 등의 사건이 허정의 화면을 온통 뒤덮고 있다. 허정의 작품에서 0과 1로 환원되어 합체를 이룬 도상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그 도상은 열쇠구멍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열쇠구멍은 저편의 미지의 세계를 열어주거나 이쪽에서 저쪽을 ‘본다’라는 행위를 상징한다.
디지털은 0과 1의 세계다. 0은 음에 1은 양에 대응한다. 음은 없음의 무가 아니라 있음의 허공이고 비어있음이다. 노자는 이를 곡신(谷神)이라 하였다. 오늘날 삼라만상의 존재양태와 사건의 양상들은 0과 1의 디지털 신호체계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1은 신호가 켜진 상태다. 의식이 발동하는 상태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의식이 살아있음의 떨림을 가진 역동적인 존재사가 되기 위해서는 0이라는 침묵을 대동해야 한다. 이 둘을 무한대로 확장하면 꽉 찬 의식과 텅 빈 허공이 함께 하는 광대무변의 우주에 이르게 된다. 그의 열쇠구멍은 세계의 근원이자 세계를 다 덮어버리고 마는 환원적 도상이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은 레이어스 앤 레이어스(layers and layers)다. 레이어는 계열적 사건의 한 단위를 평면적인 판으로 개념화시킨 것이다. 이제까지 수평적인 흐름이었던 크로노스(Kronos)의 시간에서 사건이 집중되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곧추 서는 순간이 한 겹의 레이어가 된다. 이 과정을 잘 보여주는 미술에 다색판화가 있다.
허정은 오랫동안 판화작업에 매진해왔다. 판화는 판에 비가시적으로 잠복된 가능성으로서의 0과 프린팅했을 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의 1을 반복하는 미술이다. 판화에 수반되는 레이어의 원리는 음양의 원리로도 설명될 수 있다. 음양이 합체된 그의 열쇠구멍 도상은 스티커 작업으로 구현된다. 스티커가 모인 한 판의 레이어는 판화의 한 판처럼 얹히는 꼴라쥬 작업을 거친 후 필요한 이미지만을 남기기 위해 데꼴라쥬 작업이 동원된다. 열쇠구멍 도상은 현상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그림자가 첨가된다. 그림자들은 제각기 다각도의 무질서한 빛의 방향성을 갖는다. 이는 소실점의 혼란과 분열을 야기한다.
하나의 관점(perspective)으로 ‘본다’라고 하는 행위에 놓여진 주체와 객체의 선형적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육박전을 하듯, 장소에서 돼지, 돼지저금통 등 세상의 온갖 사물들에 음양의 사건성을 사방팔방 무한대로 분열, 확장, 증폭시켜 만유하도록 하는 그의 실천이 이로써 완성이 된다.
황인, 미술평론가
허 정
학력
BA, MFA, Painting, Hongik University
2017
Layers & Layers , Gallery BOM, Boston, MA
Undefined Abstraction, The Whipple Gallery, Southwest Minnesota State University
Jung Hur, E-Moderne Gallerie, Philadelphia, PA
2016
In this Realm , Lunder Gallery , the Maine College of Art’s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White Box Gallery, NYC Art Gallery, the University of Maine at Farmington, E-Moderne Gallerie in Philadelphia
The Owen Gallery, Gould Academy, Bethel
Corey Daniels Gallery, Wells, Maine